이 둘뿐 아니라, 최근 수년간 주요 기업들의 신년사에 담긴 키워드를 쭉 보다 보면, 분명히 보이는 변화의 흐름이 있습니다. 우선 디지털 전환이나 플랫폼 구축과 같은 목표들이 사라지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사실 신세계그룹은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곳 중 하나였는데요. 특히 2022년 신년사에선 신세계 만의 온오프 융합 생태계, '신세계 유니버스' 구축을 미래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쿠팡이 예상보다 더 빠르고 무섭게 성장하면서 계산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디지털 전환 자체가 제동이 걸린 것은 물론, 본진인 이마트 오프라인 사업마저 흔들렸거든요. 이렇듯 핵심 전략이 흔들리면서, 올해 신세계그룹은 방어적인 스탠스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현대백화점그룹은 일찌감치 플랫폼이 되겠다는 목표를 접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유통 빅3 중 유일하게 대형마트 사업에 진출하지 않았고요. 한때 유행처럼 번지던 통합 온라인 플랫폼 구축에도 한 발 물러나 있었습니다. 대신 2021년 공개한 비전 2030에서 유통과 패션, 리빙을 3대 핵심 포트폴리오로 삼는다는 성장 전략을 수립하였는데요. 제조 역량을 강화하여, 자체 콘텐츠를 가진 유통기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그 덕분에 쿠팡 중심의 유통 시장 재편 속에서도 나름의 영역을 지킬 수 있었고, 이제는 다시 성장 드라이브를 걸 수 있게 된 겁니다.
이와 같은 시장의 변화에 따라 다른 유통기업들도 상품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GS리테일은 차별화된 히트 상품 개발을 올해의 핵심 전략 중 하나로 선포하였는데요. 작년까지만 해도 디지털 전환이 상품 강화보다 먼저 나왔었는데, 올해는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디지털 전환 역시 플랫폼 구축보다는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식으로 초점이 다소 변하였고요.
해외로 나가거나, 유통을 떠나거나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 낸 주범, 쿠팡의 올해 행보는 어떠할까요? 쿠팡은 별도 신년사를 내놓진 않지만, 컨퍼런스 콜에서의 모두 발언에서 어느 정도 힌트는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최근인 2023년 3분기 실적 컨퍼런스 콜에서 쿠팡의 김범석 CEO는 성장을 가장 중요한 화두로 강조하였고요. 특히 말미에서 대만 사업의 잠재력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시장의 성장이 둔화되자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한 건데요. 더욱이 최근에는 파페치를 인수하며, 앞으로는 더욱 글로벌 확장에 집중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국내 시장의 저성장 기조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이자, 오히려 해외 사업에 치중하는 것 또한 하나의 트렌드이기도 한데요. 쿠팡뿐 아니라 포시마크 인수 이후 네이버나, 해외 매출 비중을 확대 중인 농심, CJ제일제당 등도 유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예 B2C 사업 비중을 줄이고, 사업 구조를 재편하는 극단적인 케이스도 나오고 있는데요. 롯데그룹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롯데의 신동빈 회장은 신년사에서 AI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사업 혁신을 특히 당부하였는데요. 특이점은 유통 관련 계열사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는 그룹의 중심축이 완전히 화학 부문을 비롯한 신사업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하고요.
지금까지 주요 기업들의 신년사를 통해 2024년 유통업계의 모습을 전망해 보았습니다. 올해에는 쿠팡의 독주가 지속되는 가운데, 제조 역량을 강화하여 플랫폼 경쟁력을 보완하거나, 혹은 해외와 신사업을 통해 새로운 성장 기회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주된 흐름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과연 위기 속 기회를 잡을 기업은 어디가 될지 함께 지켜보도록 하시죠.